美·日 등 천문학적 반도체 보조금 경쟁 속 뒤처진 한국

美, 인텔 195억 달러 이어 삼성전자에 60억 달러 보조금 지급 계획
日 TSMC 공장에 12,000엔 지원, EU·대만·인도 등 시설 유치 경쟁
21대 국회 임기 종료 앞두고 K칩스법·한국판 IRA 사실상 폐기 수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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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반도체 전쟁(Chip War)이 심화되는 가운데 미국, 일본, 유럽연합(EU) 등 주요국들은 거액의 보조금을 주고 첨단 반도체 기업의 생산시설을 유치하기 위해 경쟁하고 있다. 글로벌 반도체 산업의 패권 경쟁이 기업 간 기술 경쟁을 넘어 국가 대항전의 양상을 보이고 있지만, 한국은 반도체 기업에 세액공제 혜택을 제공하기 위해 마련된 ‘K-칩스법’의 시효 마감이 예정돼 있어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미국, 일본, EU, 대만 등 주요국 반도체 보조금 경쟁 심화

지난 25일(현지시간) 블룸버그 통신 등은 미국 정부가 반도체법(CHIPS and Science Act)에 따라 삼성전자에 60억 달러(약 8조원) 규모의 보조금을 지급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는 당초 예상했던 최대 수급액보다 2배가량 큰 규모로 경쟁사인 TSMC보다도 10억 달러(약 1조3,000억원) 많은 금액이다. 외국 기업에 대한 파격적인 지원 결정임을 미뤄볼 때 삼성전자가 미국 현지 생산시설에 대한 추가 투자를 약속했을 가능성이 높다.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미국 상무부는 이르면 오는 28일 삼성전자에 대한 보조금 지원계획을 공식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 상무부 발표 직후 삼성전자는 추가 투자 계획을 발표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 정부는 지난 2022년부터 반도체 기업의 미국 내 설비 투자를 장려하기 위해 반도체법을 시행하고 있다. 반도체법은 미국 내 반도체 설비 투자와 연구·개발(R&D)에 527억 달러(약 70조원)의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이미 전 세계 170여 개 기업들이 미 정부 보조금을 받기 위해 460여 건의 투자의향서를 제출했다. 지난 20일 삼성전자에 앞서 미국 상무부는 자국 기업 인텔에 반도체법 시행 이후 최대 보조금인 총 195억 달러(약 26조원)를 지원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인텔 역시 상무부의 발표 직후 시설 투자를 향후 5년간 1,000억 달러(약 130조원)로 상향했다.

최근 ‘반도체 르네상스’를 선언한 일본도 생산시설 유치 경쟁에 나섰다. 특히 보조금을 현금으로 선지급한다는 점이 핵심이다. 지난달 24일 일본 정부는 구마모토현에 개소한 TSMC 제1공장에 4,760억 엔(약 4조2,000억원)의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또한 2027년 가동을 목표로 지난 2월에 착공한 TSMC 제2공장에도 7,320억 엔(약 6조5,000억원)의 보조금을 지원할 계획이다. 도요타, 소니, NTT 등 일본 주요 기업 8곳이 합작해 설립한 반도체 기업 라피더스에는 설비투자액 5조 엔(약 44조5,000억원)을 투입하기로 했다. 이외에도 일본 정부는 삼성전자, 마이크론 등 글로벌 반도체 기업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다.

EU도 보조금 경쟁에 뛰어들었다. EU는 지난해 9월부터 ‘EU반도체법’을 시행하고 이를 근거로 총 430억 유로(약 62조3,000억원)를 투입한다는 계획이다. EU반도체법은 글로벌 반도체 시장 점유율을 현재 10% 수준에서 2030년 20%로 확대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한국과 경쟁하고 있는 대만도 자국의 반도체 클러스터 강화에 주력하고 있다. 최근 대만 정부는 라이칭더 총통 당선인이 후보 시절 제안한 ‘타오위안·신주·먀오리 대(大)실리콘밸리 계획’을 승인하고 오는 2027년까지 4년간 1,000억 대만달러(약 4조2,000억원)를 투입해 클러스터를 조성할 계획이다.

반도체 등 시설 투자 세제 혜택 담은 ‘K칩스법’ 국회 통과

지난해 3월 한국에서는 국내 반도체 산업 지원을 위한 ‘국가첨단전략산업 경쟁력 강화 및 보호에 관한 특별조치법’ 일부개정법률안과 ‘조세특례제한법’ 일부개정법률안, 이른바 ‘K칩스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반도체 등 국가전략기술산업의 첨단시설 투자기업에 세제 혜택을 주고 인·허가를 빠르게 처리해 신속히 산업단지를 조성하도록 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하지만 K칩스법은 국회 발의 단계부터 여야간 입장 차로 법안 통과에 어려움을 겼었다.

지난해 1월 정부는 반도체 등 국가전략기술산업 시설투자액에 대한 세액공제율을 대기업과 중견기업은 8%에서 15%로, 중소기업은 16%에서 25%로 상향하는 내용의 조특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가 조세소위를 열어 K칩스법 관련 논의를 시작했지만, 민주당은 개정안이 통과될 경우 감세효과가 3조5,000억원에 달하는 만큼 ‘재벌 특혜’ 논란과 세수 감소분에 대한 대안을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며 반대 입장을 밝혔다. 이후 K칩스법은 지지부진한 논의를 이어가다 민주당의 주장을 수용해 세액공제 대상에 수소 기술, 전기차와 자율주행차를 포함한 미래형 이동수단을 포함하면서 본회의를 통과했다.

‘한국판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왔다. 지난해 K칩스법 통과 당시 정치권에서는 ‘탄소중립 산업 보호와 경쟁력 강화를 위한 특별조치법’과 조특법 개정안을 합쳐 한국판 IRA을 발의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후 지난해 5월 김상훈 국민의힘 의원이 세액공제 직접환급제 도입을 위한 조특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영업이익이 발생한 기업에만 법인세를 공제하는 방식의 제한점을 보완해 반도체·배터리·백신·미래차 등 국가전략기술산업에 대규모 투자를 하고도 이익이 나지 않아 세액공제 혜택을 보지 못하는 기업에 대해 세액공제분만큼 현금 환급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았다.

‘한국판 IRA’ 도입 지연되면서 국내 시장서 중국산에 밀려

하지만 지난 2월 21대 마지막 임시국회가 마무리되면서 ‘한국판 IRA법’은 사실상 무위로 끝날 가능성이 높아졌다. 법안이 통과되기 위해서는 여야의 적극적인 관심이 필요하지만 총선을 앞두고 국민의힘은 해당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을 공론화하거나 공식적인 정책으로 채택하지 않았고, 민주당도 명시적으로 찬성의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여야와 정부가 신중론을 내세우며 미온적인 태도를 이어가는 동안 한국 기업들은 국내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일례로 지난해 한화솔루션 신재생에너지(태양광) 부문은 3분기 영업이익에 미국 IRA 세액공제액 350억원이 포함되면서 적자를 피할 수 있었다. 당초 태양광 모듈 판매가 감소하면서 적자 전환이 불가피할 것이란 관측이 있었지만 IRA 수혜 덕에 347억원의 영업이익을 거뒀다. 현재 한화솔루션은 미국 조지아주 달튼공장과 가터스빌 공장을 중심으로 북미 태양광 통합 생산단지 ‘솔라허브’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 올해 공장 증설이 마무리되면 북미 내 모듈 생산능력은 8.4기가와트(GW)로 늘어난다. 이를 통해 태양광 수요가 빠르게 확대되는 북미 시장을 선점하는 동시에 향후 IRA 보조금 증대를 꾀한다는 전략이다.

이에 반해 국내에서는 대체에너지 시장의 침체가 이어지는 가운데 국산 제품들이 저가 물량 공세를 펼치고 있는 중국산 제품이 밀리는 현상까지 발생하고 있다. 국내 태양광 시장은 지난 2020년 5.5GW로 정점을 찍은 이후 지난해 2GW에 머물렀다. 국산 모듈보다 저렴한 중국산 모듈의 수요가 크게 늘면서 한화솔루션 신재생에너지 부문의 3분기 내수 매출액도 전년 대비 감소했다. 지난해 7월에는 산업통상자원부가 소규모 태양광 발전사업자의 안정적인 수익 보장을 위해 고정가격으로 계약을 맺는 ‘소형태양광 고정가격계약제도(FIT)’를 종료하기로 결정하면서 소규모 태양광 사업자도 위기를 맞았다.

뿐만 아니라 지난해 4월 산업통상자원부는 해상풍력발전사업에서 국산 부품을 50% 이상 사용할 때 신재생에너지공급인증서(REC) 가중치를 주는 규정을 삭제하기로 했다. 해당 제도는 지난 2021년 12월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해상풍력발전의 경제성을 보완하고 국내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제정됐다. 하지만 대체에너지 시장의 침체로 인해 2021년 이후 국내 해상풍력의 신규 설치가 없어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올해 말 일몰을 앞두고 있는 ‘K-칩스법’도 연장안도 국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제21대 국회의 임기는 5월 29일이지만 총선을 앞두고 국회가 사실상 개점휴업에 들어간 상태다. 김학용 국민의힘 의원이 K칩스법 일몰을 2030년까지 6년 연장하는 조특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현재 상임위에 계류 중이다. 양향자 개혁신당 원내대표는 이른바 ‘K칩스법 시즌2’로 불리는 6건의 패키지 법안을 발의했지만 이중 조특법 개정안만 기재위에 상정됐을 뿐 나머지 법안은 상임위에서 논의조차 이뤄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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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산업통상자원부

세액공제 방식, 지원대상 등 지원체계의 과감한 개편 필요

한국이 반도체 지원에 주춤하는 사이 인도, 베트남 등 신흥국들마저 자국의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해 글로벌 기업을 적극 지원하고 나선 모양새다. 인도는 정부 보조금과 양질 IT 인력을 앞세워 마이크론, AMD, 어플라이드머티리얼스, 마이크로칩, 램리서치, 폭스콘 등 각국 반도체 기업의 투자 유치를 이끌어냈다. 저렴한 인건비가 장점인 베트남은 현재 진입장벽인 낮은 후공정에 집중하고 있으며 향후 전 공정에 걸쳐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을 유치한다는 전략이다.

이렇듯 전 세계 국가가 반도체 생산기지를 확보하기 위해 확보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상황 속, 한국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선 정부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더욱이 국내 기업들이 중국의 저가 공세에 밀려 기술 패권 경쟁에서 불리한 상황에 우리 정부의 반도체 지원 정책은 주요국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특히 설비 투자와 R&D 투자에 세액 공제 혜택을 제공하는 방식이 국내 반도체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기업에게 적합하지 않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세액 공제는 투자가 선행돼야 받을 수 있는 혜택으로 일부 대기업에는 유효할 수 있지만 자금력이 부족한 국내 중소기업들은 투자 자체를 확보하기 어려워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R&D 지원도 개선이 필요하다. 일례로 정부 지원금은 통상 전체 예산의 40~50%를 인건비로 사용하게 돼있어 나머지 50~60% 예산만으로는 기술 개발이 쉽지 않다. 여기에 재료 구입비 등의 사용에도 제한이 많아 국고 지원금의 사용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게다가 반도체 분야는 기술 사이클이 매우 빠른 분야인 만큼 연구기관이나 대학이 개발한 원천 기술을 적기에 이전받기 위한 제도 정비가 우선돼야 한다다. 이렇다 보니 소부장 부문의 중견·중소기업들 사이에서는 보조금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미국에 투자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의견마저 나온다.

지원대상에 대한 논란도 계속되고 있다. 정부가 발표한 ‘세계 최대·최고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 조성방안’에 따르면 올해 반도체 중소·중견기업에 1조3,000억원, 외국기업에 2,000억원의 투자유치 인센티브를 현금으로 지급할 계획이다. 하지만 이 경우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국내 대기업만 보조금 지원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문제점이 있다. 지원금의 규모가 미국, 일본, 인도 등이 책정한 천문학적인 규모에 못 미친다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재벌 특혜’를 이유로 한국 대기업만 보조금을 주지 않으면 반도체 패권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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